〈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작동은 남는가〉
A예전 작업들을 한꺼번에 다시 보니까 이상한 반복이 있어요. 주식 데이터를 소리로 만들고, 소리를 다시 악보로 만들고, 난수방송의 숫자를 몸의 움직임으로 바꾸고. 데이터를 계속 다른 것으로 옮기고 있잖아요.
이진형맞아요. 그런데 당시에는 그걸 하나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각각 다른 작업이라고 생각했죠.
A지금 보면요?
이진형지금 보면 계속 비슷한 짓을 했던 것 같아요. 뭔가를 가져와서 원래 쓰이던 방식으로는 안 쓰는 거죠.
A‘다르게 본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건가요?
이진형그 말은 좀 안 맞는 것 같아요. 데이터를 시각화해서 원래 안 보이던 걸 보여준다거나, 소리로 바꿔서 더 잘 이해하게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반대에 가까워요. 원래 데이터가 가지고 있던 내용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A내용을 제거하는 건가요?
이진형제거한다기보다는… 건조시킨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아요. 주식 데이터라면 어떤 회사의 주가가 왜 올랐는지, 그게 경제적으로 무슨 의미인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작업에 들어오면 그런 내용은 거의 없어져요. 상승하고 하락하는 폭이나 간격, 반복 같은 것만 남죠.
A그러면 데이터의 껍데기만 사용하는 건가요?
이진형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껍데기라고 하기에는 또 뭔가가 남아 있어요. 변화량이라든가 순서라든가 리듬 같은 것들. 내용은 없어졌는데 완전히 빈 것은 아닌 거죠.
A내용은 없어지지만 작동 방식은 남는다.
이진형네. 그 표현은 좀 맞는 것 같아요.
A<Stock March>를 보면 연평도 사건 당시의 코스피, 방산 관련 주식, 직접 보유한 주식의 데이터를 가져와 소리로 만들고, 그 소리를 다시 악보로 옮기고, 결국 행진곡으로 연주하게 되죠. 굉장히 긴 변환을 거칩니다.
이진형지금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죠. 데이터에서 바로 음악을 만들 수도 있었는데 굳이 소리를 만들고, 다시 그걸 악보로 바꾸고, 또 사람에게 연주하게 했어요.
A왜 그랬을까요?
이진형모르겠어요. 결과만 얻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중간을 계속 거치게 만드는 게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A그리고 매번 조금씩 원본에서 멀어지고요.
이진형그렇죠. 마지막에 나온 음악을 들으면 원래 데이터가 뭔지는 거의 알 수 없어요.
A그런데 완전히 무관해진 것도 아닙니다. 전쟁이라는 사건과 방산주의 상승이 여러 단계를 통과한 끝에 ‘행진곡’이라는 형태에 도착하니까요.
이진형그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제가 행진곡을 먼저 정하고 거기에 맞는 데이터를 찾았다면 너무 직접적인데, 전혀 다른 규칙을 계속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거기 도착하는 거니까.
A약간의 오역 같은 것이 생기는군요.
이진형오역이라는 말은 좋은데, 번역하고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해요. 번역은 그래도 원래 뜻을 전달하려는 거잖아요. 저는 원래 뜻을 전달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A그래서 transduction이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하나의 의미를 다른 언어로 보존해서 전달하는 것보다, 어떤 신호가 다른 체계에 들어가면서 그 체계의 규칙에 따라 다시 구성되는 것에 가까운.
이진형그건 지금 와서 보면 잘 맞는 것 같아요. 다만 당시 제가 그런 개념을 알고 작업한 것은 아니고요.
A오히려 그래서 흥미롭습니다. 개념이 먼저 있고 작업이 그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여러 작업을 오래 지나고 나서 뒤늦게 공통된 방법이 발견된다는 점에서요.
이진형저도 이번에 옛날 작업을 다시 정리하면서 처음 발견한 거니까요.
A<국군 난수체조>도 비슷합니다. 난수방송의 숫자는 원래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암호인데, 작업에서는 그것을 해독하지 않죠.
이진형해독할 수도 없고요. 난수표가 없으니까.
A그런데 해독할 수 없는 숫자를 그대로 버리지 않고 전혀 다른 명령 체계에 넣습니다.
이진형무용이나 운동의 기호로 바꿔서 몸을 움직이게 했죠.
A원래 메시지는 사라졌는데 명령이라는 성격은 이상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진형아, 그건 지금 들으니까 재미있네요.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A누군가에게 행동을 지시하던 숫자가 원래의 명령을 잃고도 다시 사람의 몸을 움직이는 명령이 된 셈입니다.
이진형그렇네요. 내용은 완전히 달라졌는데 하는 짓은 비슷하네요.
A그래서 이 작업들을 보면서 계속 드는 질문이 있습니다. 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작동은 남는가.
이진형그건 꽤 좋은 질문 같아요.
A방사능 작업도 그렇습니다. 방사능 수치는 원래 위험을 판단하기 위한 정보인데, 작업에서는 위험도를 설명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이미지가 되어 공간의 표면을 돌아다닙니다.
이진형네. 방사능이 어디까지 왔고 얼마나 위험한지를 시각화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디에든 존재할 수 있다는 성질 쪽이 더 중요했죠.
A그러면 여기서도 정보의 내용보다 그것이 가진 어떤 행동 방식이 선택됩니다.
이진형네. 그렇게 묶어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맞는 것 같아요.
A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작업들이 꽤 우습습니다. 전쟁과 주식이 행진곡이 되고, 비밀통신이 체조가 되고, 학교생활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레벨업하지 못하는 RPG가 됩니다.
이진형원래 좀 그런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 설명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A직접 비판하기보다 시스템을 이상하게 연결해버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이진형맞아요. “이것은 이런 문제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 그냥 이상한 데 꽂아버리는 거죠.
A그러면 변환에서 발생하는 오차가 상당히 중요하겠네요.
이진형결과가 너무 정확하면 별로 재미없을 것 같아요.
AA를 B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A를 B의 규칙으로 잘못 실행해보는 것.
이진형그건 되게 정확한 표현 같네요.
A그리고 그 잘못된 실행에서 원래 대상의 다른 면이 튀어나옵니다.
이진형그런데 또 그걸 “다른 면을 발견하기 위해서” 했다고 하면 너무 목적론적인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그렇게 했고, 나중에 보면 뭔가 나와 있었던 것에 가까워요.
A그 차이는 남겨두는 게 좋겠습니다. 작업이 어떤 결과를 생산하지만 그 결과를 미리 목표로 삼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
이진형네. 그리고 사실 지금도 왜 그랬는지는 완전히 모르겠어요.
A어쩌면 그걸 모르는 상태 자체가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설명으로 정리되는 순간 이 작업들이 다시 하나의 의미 안에 갇히니까요.
이진형그렇죠. 지금 와서 “나는 지난 15년 동안 transduction을 탐구해온 작가입니다”라고 하면 좀 웃기잖아요.
A상당히 웃깁니다.
이진형하하.
A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정도는 어떨까요. 데이터든 사건이든 그것을 원래의 체계에서 꺼내 다른 규칙 안에 집어넣는 일이 여러 작업에서 반복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내용은 약해지고 구조와 작동은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진다.
이진형그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요. 결론이라기보다 지금 다시 보니까 그렇게 보인다는 정도로.
A그렇다면 마지막 질문도 결론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진형어떤 질문이요?
A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작동은 남는가.
이진형네.
A그리고 그렇게 남은 것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것인가.
이진형그건 아직 모르겠네요.